연극 '미인도' 위작 논란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제 2학예실에서 벌어진 일> 리뷰
‘믿을 것 하나 없다’는 말은 참이 된 것 같다. 팩트 체크는 일상이 됐고, 진실을 위해 끝까지 판다는 뉴스 코너는 그 방증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 진실을 향한 검증은, 주어진 어떤 사실과 그를 둘러싼 감춰진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오래된 사명을 넘어, 다시는 속지 않기로 한 결단 같다. 이를테면 진실의 힘이 퇴색되어가는 탈 진실의 시대에 맞서는 격렬한 저항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실천은 매번 흔들리고, 이 낯설지 않은 위기는 다음 연극의 주인공 윤예나가 직면한 공간과 시간에도 벌어진다.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된 연극 ‹‘미인도’ 위작 논란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제2학예실에서 벌어진 일들›은 널리 알려진 ‹미인도› 위작 사건을 중심으로, 같은 시기에 일어난 ‘강기훈 대필 사건’1 을 덧붙여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이 극의 서사와 세부 묘사는 명료하다. 두 사건이 가상의 결합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가 갖는 강한 친연성affinity, 거짓을 상징하는 위작과 대필이라는 매개물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묘사2 등이 두 서사를 완전히 밀착시킨다. 이 세밀함은 극에 사실성을 부여하지만, 그 효과는 상투적으로 발현된다. 아마도 다큐멘터리, 영화, 언론 등에서 반복적으로 재현하는 엄혹한 민주화 시대의 풍경에 익숙해진 탓일 텐데, 그래서 이 낯익은 틀은 실체를 쫓는 장르적인 유희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완고한 진실 앞에서도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개인을 비춘다.
예나는 진작 혹은 위작이라 여길 수 있는 정황 속에서 갈팡질팡하지만 이내 자신의 진실을 취한다. “이게(미인도) 진작이라 생각합니까?”라는 학예실장의 물음에 “이제는 진짜라고 믿고 싶어요”라고 답한다.3 여기서 진실에 접근하는 하나의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진실은 옳은 정황들의 집합을 전제하고 추론한 결과를 의미하지 않는다. 즉 진실에 도달하는 과정은 옳든 그르든 간에 개입을 통해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고, 그 결과는 사실과 상반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실의 얄궂음 앞에 연극은 초연하다. 마지막, 무대 상단에 나오는 스크린에는 그 사건의 사실로서의 결말을 분명히 전달한다. 진품일 확률 0.0002%라는 신뢰할 만한 감정연구소의 결과와 무죄 판결받은 강기훈을 명시하며, 개인이 경험하는 역사의 순간은 혼란스러울지언정 역사적 시간은 사건의 정확한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고 암시한다.
이 느긋한 마음가짐을 항상 긍정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이로운 점은 있다. 탈 진실의 혼란과 얽혀있는 ‘모든 의견을 동등하게 대하라’는 근사한 미신을 걷어준다는 점이다. 이 포스트모던식의 해체가 불러일으킨 파장은 다의적인 해석이란 풍요로움을 줬지만, 광범위한 혼란함을 동반했다. 그 결과 우리는 기계적인 중립성의 덫에 걸려 겉으로는 해결되는 척했던 참담한 결과 – 5·18 광주 민주화운동, 친일파, 일본군 위안부, 일제 강제노역 등의 악의적 조작과 왜곡 – 를 맞이했다. 단순한 오류가 아니다. 이를 주장하는 무리는 의도적 편향성에 기반하여 사실을 왜곡 조작하며 자의적인 해석을 남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겹다, 언젠가는 잊힐 일, 평생 그 슬픔을 짊어지고 살 것인가?”라며 종결을 재촉한다. 이제 당연한 진실도 위태롭다. 표현의 자유가 그 자유를 위해 싸운 이들의 목을 겨누는 이상한 모순이 생겨난 후 다들 중립이라는 그럴싸한 균형점을 찾기 바빠졌다. 하지만 엄연히 변하지 않는 사실은 존재하고, 모든 의견은 동등하지 않다. 이 점에서 연극은 진실에 대한 교훈을 전달할 수 있다. 진실을 향한 적극적인 개입과 실천은 지금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지만 연극의 끝은 찝찝하다. 2016년 학예실장이 된 예나는 ‹미인도›의 재공개를 발표하며 흐느낀다. 그녀의 슬픔은 와닿지 않는다. 연인의 죽음에 있어 방조자이자 위작 사건의 적극적 협력자였던 그녀의 성공이 달갑지 않고, 흐느낌이 가리키는 반성과 애도의 몸짓은 엄밀하게 수혜자인 그녀를 억압적인 시대의 피해자로 둔갑시킨다. 이제 통속적 감성이 시대를 가린다. 극의 절정에 흐르는 사운드 트랙은 그 감성을 강화한다. “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아” ‹가시나무›의 노랫말, “오늘 밤은 너무 무섭고 정다웠던 옛날이 그립다”4는 절규에 가까운 주인공의 노래 모두, 시대 앞에 무력한 개인의 비애를 가리키며, 탕감될 수 없는 윤리적 부채를 덜어주려는 속내를 내비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 시기 그녀와 같은 괴로움을 겪은 이들은 있었고 그녀와 다른 선택을 한 이들도 존재했으며, 그 대다수는 아직 현존한다. 그 시대와의 화해와 용서는 그녀의 몫은 아니다.
이 아쉬운 결말로 인해 연극이 가진 유익함은 퇴색된다. 심지어 91년의 소환이 수상쩍다. 80년대가 함유한 사회 전반의 격변은 사회 구조와 개인 사이의 감정적 서사로 치환될 만큼 단순하지 않다. 격세지감의 과거로서 90년대를 기능적으로 소비하고 시대가 남긴 문제에 손쉬운 해결책을 시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비극적인 시대의 기억은 하나의 심미적 양식으로 기능하며 하나의 볼거리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다. 그렇기에 천경자 딸 김희정의 항변은 현실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1 1991년 노태우 정권의 부정부패와 폭압에 항의하는 대학생들의 잇따른 분신 중 김기설 분신자살 사건에 대해 검찰이 같은 단체 동료였던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기소해 처벌한 인권침해 사건, ‹‘미인도’ 위작 논란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제2학예실에서 벌어진 일들› 프로그램 북
2 운동권 출신 국립현대미술관 공채 1기 학예사 주인공, 세상의 변혁이 전부인 운동권 연인, 선택받기보다 선택하는 힘의 논리에 충실한 학예실장, 갈등을 피하고 소시민적인 안락함을 추구하는 남자 학예관, 임신으로 인해 직장에서 쫓겨날까 전전긍긍하는 여자 학예관,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래서 사회적 편견으로 자유롭지 못한 또 다른 여자 학예관, 시대의 피해자로서 천경자를 대리하는 그녀의 딸. 각 등장인물에 시대의 전형성이 잘 반영되어 있다.
3 연극은 사건을 사실적으로 다루지만 역설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다.
4 가요 ‹오늘밤›, 김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