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은 사회와 연결고리를 찾는다. 보통의 방법은 “사회·정치적인 쟁점을 어떻게 아니, 어떻게든 재현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작업이라는 것은 어떤 이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느낌만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거칠게 위 조건이 작업이면, 이미 SNS에 부유하는 정보들은 충분히 작업이며, 그들 모두가 예술가일 수 있다. 그들의 게시물은 취향의 과시, 현란함, 화제와 영향력을 위한 시각 재현물의 형식을 띤다. 그렇다면 사적인 미술 생산의 방식과 무엇이 그리 다를까?
작업은 가장 사적인 무엇을 표현한다고 할지라도 보이지 않게 은밀하게 연결된다. 개인은 전체 중 일부고 단지 알 수 없는 개인 한 명을 투영하여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경험 속에 비춰 바라볼 수밖에 없다. 작업은 그 매개를 통해 사회 전체 속에서 드러낼 수도 있고 폭로나 비판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주변에 있는 미적 경험과 대상들을 분석하고 이해를 위한 하나의 중요한 길잡이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바깥세상, 내부 세계와 관계없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맥락은 기존의 예술적 실천 과정에서 들을 수 있는 상투형에 가깝다. 오히려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떠오른다. SNS 예술가들은 사회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그들은 사회의 오류들에 대한 저항으로서 의견을 피력하지 않았던가? 미감의 훈련도가 떨어지는가? 그렇다면 작업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작업을 다른 관점으로 전환해보자. 작업을 노동(work)으로 본다면, 작업(work)이 직업(occupation)으로 전환되었을 때 내가 하는 행위를 생각한다. 이런 측면에서 작업은 사회와의 관계를 확실히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이제 작업과 관련한 사회경제적인 물음이 생긴다. 작가 혹은 예술가인가? 기타 파생 노동자인가?(나 스스로 프리랜서 사진가인가? 사진 교육자? 가내 수공업식 미술품 대여업자 혹은 미술품 설치 업자인가?)
작업이 노동이면 이는 생산 행위이고 그 결과물이 발생한다. 결과물은 일종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즉 결과물은 상품, 대가를 지급받게 하는 경제적 도구로 바뀐다. 즉, 밥벌이다. 그러나 대개의 예술가는 빈털터리이다. 무급에 가까운 노동 행위를 지속하며 JPG 장인으로 이미지 콘텐츠를 갤러리와 미술관에 납품하는 업자가 된다. 엄밀하게 노동이지만 우아한 무급 노동자와 같다. 그나마 직업적으로 생활을 꾸려간다면 마감의 미려함과 눈뽕용 기획 전시, 고급 인쇄물에 의지하거나 이야기꾼이 되어 연명한다. 파생적 직업군들은 어떠한가?
프리랜서 사진가와 작가의 증빙은 비슷하다. 선별된 알찬 정보를 포트폴리오로 구성하여 자신의 역량과 노련미를 알린다. 거기에 예술적 이력은 더욱 매력적인 사항이 된다. 단순히 상품을 만드는 제작자에서 훌륭한 미감의 소유자로, 완성도 높은 장인으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자기 착취가 일상인 예술가의 대가에 비하면 분명히 많은 돈이 지급된다. 교육자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알찬 수업의 구성과 좋은 교수법 이외에 작가라는 그럴듯한 명함은 자신의 말에 권위를 심어주고 진정성 있는 교육자로 보일 수 있다.
안다. 미술계는 거친 모순과 착취의 공간. 하나의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여러 개의 생업이 보조하고, 이 현실은 익숙한 괴로움이다. 거기에 유명인들의 치유의 과정으로서의 미술을 호소하며 그들에게만 허용되는 낮은 진입장벽과 몇천만 원이 호가하는 작품 가격은 상대적 박탈감을 유발하며 창작 의욕마저 꺾는다. 이 고달픈 현실을 들추는 것이 괴팍한 취미거나 작업자로서의 순수성, 결백성의 증명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것들은 거짓 이상주의로 가장되어 있거나 좋은 세일즈 포인트일 뿐이다. 다만, 우리는 아직도 작업한다며 미술의 세계를 평등의 경제가 유효하다는 믿음을 붙잡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계의 생산자들은 투자 수익률과 관객몰이를 중시하는 기업 논리에 충실한 예술이 되어 가도록 강요받는다. 소수의 예술가들은 기업가적인 마음가짐을 빠르게 탑재하고, 다수의 생존은 더욱 불확실해졌고 선보일 기회는 희박해졌으며, 작품은 이제 주문되고 맞춤된다. 또한 예술적 실천은 폐쇄적 공동체의 게임 언어로 치부되고, 예술가의 역량은 여유 있는 자들의 학위 쇼핑으로 조롱당한다. 확실히 사회와 다르지 않다.
진작에 그에 대항하는 미술 역시 시장 안에서 좋은 명망을 통해 높은 화폐가치로 교환되고, 미술가는 스타임이 증명됐다. 이제 작업자는 지나친 공정함을 논하기보다 다음과 같이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가진 평범함과 궁핍함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언제나 실패, 모순, 자기혐오, 현실 냉소의 악순환은 반복된다. 엄격한 자기 객관화, 실패의 계속에도 무너지지 않는 정신. 단순히 구조의 모순과 한계에 대한 분노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냉소는 쉽고 실천은 어렵다.” 분명한 점은 이 종말 게임에 맞서는 정신승리는 분노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히토 슈타이얼 Hitto steyerl의 영감 받아 작성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