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시그니처(Signature)는 계약서에서 시작됐다. 여기서 서명은 창작을 위한 금전 마련의 출발점이다. 부모 스폰의 안정감과 내 돈 주고 하는 창작의 순수성을 간과하지 않지만, 여러 해 기금에 기댔던 형편에서 ‘남의 돈으로 하는 내 작업’이라는 자부심만큼 사기를 북돋는 일은 없는 듯하다. 오늘도 연례행사인 문화예술진흥기금을 타기 위해 서류에 공을 들이고 있다. 뭐 그리 집착하느냐는 핀잔도 듣지만, 배곯음과 함께 결백이 끝장난 경험 탓에 이 골치 아픈 일에서 마냥 초연하긴 어렵다.
 단순히 창작 지원 사업이 재원만을 제공했던 것은 아니다. 아직 할 수 있다는 생존본능을 깨웠고 내 활동 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누구를 어떻게 지원해주느냐에 따라 어떤 변화의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먼 데 찾지 않아도 한국예술종합학교가 가진 제도를 활용해 볼 수 있다
.

한예종의 창작 지원 제도

 학교 창작 사업은 육성시스템의 성격을 띤다. 대외적으로는 우수 작품을 성장시켜 외부로의 진출을 돕고 바깥에서 환영받지 못한 예술 실험과 창의성을 안으로 끌어들여 독려한다. 그 일환으로 이름난 실무 기획자를 2차 면접 심사위원으로 섭외하거나 지역문화재단과 연계한 프로그램을 통해 외부 노출 빈도를 높인다. 대상별로는 재학생의 과제 및 졸업 작품을 위한 예산 보충과 모의 연습의 장이 되며, 갓 졸업한 학생들에게는 미완으로 남은 작품의 완결과 졸업 후 새로운 디딤돌의 역할을 한다. 또한 초보 예술인에게는 진입 장벽이 높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문화재단 등의 외부제도에 대한 선행학습과 예술실험이 가진 불확실성에 대비한 완충 장치 등으로 활용될 수 있다. 전반적으로 예비 창작망을 구축하고 생존력을 강화한다는 면에서 학교의 지원 방향은 고무적이다. 
다음은 필자가 학교 내에서 운영되고 있는 창작지원 사업을 정리한 자료다.​​​​​​​
(1) 지원 신청

1) 정보 취득이 우선이다. 찾아야 할 정보는 목적과 대상, 시기별로 다양하다. 주로 K-Arts 누리를 통해 공지를 접할 수 있으며, 해당 기관 홈페이지2 또는 학교 담벼락이나 안내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개 정기 공모는 비슷한 시기에 개최되지만 개편에 따라 시기가 변경될 수 있고 일회적일지라도 크고 작은 사업이 불쑥 있어 공지를 자주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2) 신청서는 간결하고 정확한 문체로 작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행정 서류까지 예술적일 필요는 없다. 수많은 서류를 검토해야 하는 관계자의 눈에 수사적 표현은 수다스럽게 보일 뿐이다. 오히려 도표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가 보탬이 된다. 무엇보다 자신의 역량을 단박에 드러낼 수 있는 포트폴리오 구성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대내외 수상 경력을 나열하는 식의 이력 뽐내기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학교인 만큼 현재의 기획과 그동안의 작업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3) 서류전형 후에는 2차 면접이 있다. 학교는 알든 모르든 내부 관계망이기에 비교적 인간적이다. 그래도 면접 심사라는 것이 마냥 우호적일 수만은 없어 제한시간 내에 작업의 요점을 절지 않고 읊는 훈련과 의연한 표정 관리 정도의 준비는 필수다. 일련의 과정이 다소 소모적일지라도 금전적 지원과 타인의 인정이 결합한 선정 효과는 확실히 창작욕을 일으킬 것이다.
(2) 예산의 사용과 정산

 분명 학교 기관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예산의 사용 범위는 보수적이다. 사업 목적과 규모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주요 방식과 사용 시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은 다음과 같다.

1) 운용기관에서 직접 집행하는 방식: 주로 큰 규모의 완성형 단계의 사업에 해당한다. 이 경우 담당 기관이 예산 계획을 꼼꼼하게 검토한 후 승인을 거친다. 행정 처리에 익숙지 않은 사용자에게는 검토-반려-수정의 반복이 과중한 문서작업처럼 여겨질 수 있다.

2) 선정자가 기관 명의의 카드를 직접 수령하여 확정된 예산대로 결제하는 방식: 금액이 큰 지원에서도 일부 쓰이지만 주로 작은 규모에서 쓰는 방법이다. 카드를 일회적으로 사용한다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크고 작은 결제가 많으면 수령과 반납을 위해 자주 왕복해야 하는 점이 번거롭다.

3) 정액 지급 방식: 예산 사용의 자유도가 비교적 높다. 단 100만 원 내외의 적은 금액이 아쉽다. 그리고 지급 형태에 따라 세금 공제율과 사용 항목에 제한이 있을 수 있다.

정액지급 예시 1 - 융합예술센터의 휴먼스케일: 중간발표의 형식을 통해 진행 경과를 검토한 후 총액을 나누어 제공. 이 경우 세액 3.3% 공제 후 지급한다.
정액지급 예시 2 - 발전재단의 K’ARTOON: 크라우드 펀딩과 부족한 부분을 장학금의 형태로 지급. 이 경우 세금 0%이다.

 그러나 불편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한적 사용은 정산의 부담을 덜어주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외부 정산시스템의 경우 건별 영수증 챙기기, 용역 계약서 작성, 사례비 이체명세, 개인정보 사용 서약서, 비교 견적서 등 금전 사용의 투명함과 타당성에 대한 일체를 증빙하고 지원금 예치 기간 동안 발생한 이자 반납과 각종 세금 납부 등의 회계처리를 거쳐야 하므로 꽤 시간이 허비된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학교 기관이라는 특수성에서 비롯된 제약은 창작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3) 결과와 성과

 결국 돈은 사라지고, 남는 건 창작물이다. 앞서 계약서에서 할 수 있다고 한 서명은 해야만 하는 일로 다가온다. 결과는 자신이 가능하다고 말한 기획을 기어코 완수해야 하는 임무가 되고 성과의 압박은 창작을 가속한다. 기금의 채무적 속성에 불안감을 느끼지만, 그것을 경계할 필요는 있어도 창작에 대한 냉소가 될 순 없다. 성과의 이면이 자기 착취적인 노력일지라도 자기 길을 찾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다른 면이기도 할 것이다.
최선의 노력이 반드시 최상의 결과인 적은 없다. 망할 수 있다. 망할 수밖에 없다면 잘 망하길 바란다. 부족한 여건 속에서도 어떻게 다음을 도모할 수 있을지에 대한 성공적인 실패의 경험이 창작의 결과보다 더 소중한 때이다. 모두 건투를 빈다.


Cookie Text- Smart Hysteria

  미술 생산자로 함께 했던 이들이 하나, 둘 사라질 때쯤 ‘스마트하게 살기’는 내 생존 전략이 됐다. 처음엔 기관 지침에 어리숙했지만 여러 해 기금을 받으며 유연하게 적응했다. 정신은 슬기의 과잉에 중독됐고 동기부여는 오직 공모와 기금 프로그램에 달린 듯하다. 사업 선정의 당락에 따라 호황과 불황을 오가며 흥분 상태의 조증과 우울증적 침잠 사이에서 휘청댔다. 더는 냉소의 쾌감과 회피의 거리도 낙담을 무디게 하진 못한다.

  과거 하나의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개의 생업이 보조하는 상황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현실적이고 사무 처리에 능한 경력 관리형 예술가라는 또 다른 생업을 추가한 것만 같다. 이제 작업과 삶은 동일선상에 있다. 예술과 삶은 분류할 수는 있어도 분리 불가능한 차원에 놓이고 잘 팔릴만한 것과 ‘수혜’ 받을 만한 것 사이에서 작업의 위치를 저울질해 본다. 비현실적인 상상은 생계에 맞춤 되고 재단된다. 계속하기에는 초라하고, 그만두기에는 생생하다. 어쩌면 작업은 행복 없이 사는 훈련일지도 모른다.

1 필자가 작성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관, 한 기금 지원신청서의 서명 란을 그대로 옮겼다.
2 기타 부설 기관의 홈페이지는 학교 홈페이지 내 조직-기타/부설 기관을 통하면 쉽게 접속할 수 있으며 거기에 기재된 담당 전화번호로 문의할 수 있다.

-K'ART Magazine vol.36에 올린 글-

Back to Top